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린든 B. 존슨 (문단 편집) === 재선과 베트남 전쟁 === 존슨은 대통령이 된 이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케네디 시절부터 개입해오던 [[베트남 전쟁]]의 확전을 결정[* 사실 월남전 참전은 전임 케네디의 노선을 따르면서도 또 그와는 차별화를 해야 했던 린든 존슨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란 분석도 있다. 케네디는 명분론적 우위 속에서 친미 국가의 경제 발전을 돕는다면 굳이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냉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 다만 일각에선 존슨도 베트남전 개입을 최대한 억제하려했으나, 당시 남베트남 정부가 워낙 노답이라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 면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당시 남베트남은 툭하면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는 군부독재에, 부정부패 등으로 베트남인들의 지지를 영 못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하면 1년에 3번씩 쿠데타가 일어날 지경이었으니 안보 태세가 휘청이는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의회의 지지를 얻어내고 각종 국내 정책도 착실히 추진해 연이은 64년 대선에서 61.1%라는 압도적 득표로 승리한다. [youtube(9Id_r6pNsus)] 1964년 린든 존슨이 재선에 도전할 당시 방영된 [[데이지 걸]] TV 광고. 대선에서 존슨은 데이지 꽃을 세는 평화로운 소녀와 핵폭탄 폭발 초세기를 하는 장면을 대치시켜 상대 후보인 [[배리 골드워터]] 후보(공화당)가 당선이 되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를 담은 광고를 내보냈다. 이 광고는 데이지 꽃 소녀가 나와서 "데이지 걸" 광고로도 불리며, 지금도 '''세계 역사상 가장 임팩트가 강한 정치광고'''라고 평가받으며 실제 당시 골드워터 낙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베리 골드워터]] 후보는 64년 대선에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가 된 '''[[흑인민권운동]]으로 촉발된 [[연방 민권법]]''' 제정 문제를 [[인종차별]]엔 반대하지만 연방정부가 주정부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주의 권리(states' rights)를 내세우며 반대했고, 린든 존슨은 이걸 역이용해서 골드워터를 '모든 국민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기 싫어하는 인종차별주의자'라고 공격하였다. 덕분에 표심이 많이 기울어 린든 존슨은 선거인단 수 486명 대 52명, 득표율 '''61.1%'''로[* 골드워터는 인종차별철폐에 반대했던 Deep South(사우스캐롤리이나, 조지아, 알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다섯 주와 자신의 고향인 애리조나 주를 제외하고 모조리 다 패배했다. 텍사스는 린든 존슨의 고향이어서 존슨에게 갔고, 플로리다와 노스캐롤라이나, 인디애나, 아이다호, 아칸소, 캔자스 등 공화당 우세 지역에서도 존슨이 신승을 거두었다.] 압승한다. 저 61.1% 득표율은 린든 존슨 이후의 민주당 아니 어느 정당 대선 후보도 얻지 못한 엄청난 득표율이다.[* 민주당 역사에서 손꼽히는 이력을 남긴 그 [[프랭클린 루스벨트]]조차도 최고 득표율은 60.8%였다. 다만 선거인단 수는 존슨보다 훨씬 많이 얻었는데, 1936년 대선 당시 523명을 얻어 1984년 대선의 [[로널드 레이건]]이 얻은 525명에 이은 2위다. 배리 골드워터 후보의 득표율은 38.5%.] 하지만 대승에 뒤이은 현실은 [[헬게이트]]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월남전]]의 수렁에 빠진 데다가, 외부 공격 막기도 바쁜데 내부에선 다음 대권을 노리던 정적 [[로버트 F. 케네디]]가 끊임없이 견제를 해 재임 기간 내내 스트레스에 시달렸기 때문. 덕분에 원래 법적으로는 대통령직 승계 기간이 2년이 안 되어서 다시 대선에 출마할 수 있었지만, 결국 스트레스 + 노환으로 악화된 건강과 베트남전으로 떨어진 지지도를 인정하고, 출마를 포기하였다. 존슨이 재출마하여 당선되어 임기(1969년~1973년)를 마쳤다면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가장 장기간 집권한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르나[* 사망한 해가 1973년인 관계로 만약 이럴 경우(특히 22일 사망이라 사실상 퇴임 2일 만일 수도 있었다.), 후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존슨의 장례식을 주관하는 입장이 됐을듯 하다. 실제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자 마자 존슨의 장례식을 주관했다.][* 존슨의 재선 불출마에 건강 문제도 한몫한걸 감안하면 임기를 끝마치지 못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이렇게 되면 부통령이자 실제 68년 대선 후보였던 험프리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것이다.] 이 결정으로 미국 역사상 8년 이상을 재임한 대통령은 계속 [[프랭클린 루스벨트]] 하나밖에 없게 되었다. 만약 재선에 성공했다면 10년 가까이 재임하게 될 뻔 했지만 뉴햄프셔 주 경선에서 현직 대통령이 초접전승을 거뒀다는 [[OME]]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더 해보기도 귀찮았던지 경선을 포기하고 만다.[* 대통력직에 있는 경선 후보가 경선을 포기한 최초의 사례이다.] 그리고 민주당은 내분과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 등으로 선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휴버트 험프리]] 후보가 공화당 [[리처드 닉슨]] 후보에게 석패하고 정권을 내주게 된다. 그러나 존슨의 베트남전 지지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험프리의 패배를 야기했다는 것은 상당히 부당한 주장이다. 험프리의 패배는 시민권법 제정에 뿔이 난 남부 미국독립당(딕시크랫)의 독자 출마를 막지 못한[* 당시 민주당내 비주류 보수파로, 사실상 인종주의를 장착한 극우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흑인민권운동을 당시 민주당 주류 진보파들이 지지하니 당연히 뿔이 날수 밖에 없다. 이들은 이후 상당수가 공화당에 입당한다.] 민주당 주류파의 선거 전략 미비 탓이 크며 실제 닉슨과 험프리의 득표율 차는 겨우 '''0.42%에 불과했다.''' 다만 선거인단에선 301명 : 191명 : 46명으로, 딕시크랫 없는 간발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결과에서 민주당에 딕시크랫을 더했으면 험프리가 압승하긴 한다. 근데 딕시크랫 대선후보인 [[조지 월리스]][* 이 사람은 대선 결과랑은 별개로 인류 역사에 영원히 그 이름을 남겼는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 나오는 앨라배마의 주지사가 바로 이 사람이다. 대선 당시나 그 이후에도 인종분리정책을 열렬히 펼쳤으나 암살 시도를 겪은 뒤 과거의 행보를 반성했다.]는 민권운동의 철저한 반대자인데 그 양반 뽑던 사람들이 월러스 출마 안했다고 곱게 험프리를 뽑을지도 의문이긴 하다. 또 선거인단 수를 합쳐도 237명 밖에 안됐으니 득표 수는 험프리가 앞섰으나 선거인단에서 져 대선에서 낙선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이를 노린 닉슨의 소위 남부 전략으로 이후 공화당과 민주당 텃밭은 확 바뀌게 된다. 돈과 선거 전략에서도 절치부심한 닉슨에 비해 험프리가 여러모로 부족했단 평도 있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leedk504/120066860111|여기]]나 [[리처드 닉슨]] 항목도 참조. 그래도 베트남전을 지원해야 된다는 신념은 있었는지, 존슨은 퇴임한 후에도 '''"우리는 베트남전 계속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해인 1973년까지도 전쟁은 나날이 미군에 불리해져갔고, 미국 내에서도 회의론이 벌어졌기에 존슨 본인도 이 주장이 무력함을 느끼며 죽고 만다. 본인도 후회되는 부분은 있는지, 자서전에서 "나는 훌륭한 아내(국내 정책)를 길거리 창녀(베트남전 참전)에게 잃은 꼴이다"라고 비유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